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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규는 어린 시절 국가대표 선발전을 보며 꿈을 키웠고, 아시안게임에서 세계의 강호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며 대한민국에 탁구붐을 일으켰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정식종목이 된 탁구에서 우승을 차지해 올림픽 최초의 금메달리스트로 기록된다.


태극마크를 꿈꾸게 된 장난꾸러기

어린 시절 유남규는 교장선생님이 그의 얼굴을 알 정도로 소문난 장난꾸러기였다고 한다. 노는 것을 좋아해 태권도, 복싱, 축구 등 운동을 많이 하였는데 3학년 때 학교에 축구부가 없어지고 탁구부가 생기자 탁구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탁구부에서 선수를 모집하자 손을 번쩍 들며 시켜달라고 하지만 선생님은 그가 금방 포기할까 봐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당시 유남규는 그저 체육관에서 탁구를 해보고 싶었고 그게 아니라도 어떤 운동이든 하고 싶었다고 한다.

1년 뒤 부모님의 하락을 받아 탁구부에 입단할 수 있게 된다. 그는 팀에서 유일한 왼손 잡이었고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금세 탁구에 적응한다. 남들보다 늦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1년 먼저 입단한 모두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까지 유남규에게는 탁구는 일종의 놀이일 뿐이었다고 한다. 선수가 되고 싶다거나 그런 것 없이 그냥 즐기는 운동일뿐이었다.

그런 그가 생각을 바꾸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5학년 때 부산에서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을 구경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탁구 구경을 갔는데 국가대표 선수들의 유니폼 가슴에 달린 태극기를 보고 막연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나도 태극마크를 달고 싶다." 소년 유남규에게 이루고자 하는 꿈이 생긴 것이다.

이후 유남규는 수업을 마치면 근처 공원에서 2시간씩 달리기를 하기 시작했다. 타고난 재능에 노력이 더해지게 되자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고 실력이 급성장하며 중학교 시절인 1982년 청소년 대표에 발탁되며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1983년 아시아 청소년 탁구 선수권대회에 나가 중국 선수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84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유남규는 고등학교 1학년에 그가 꿈꾸던 태극마크를 달게 된다. 그가 태극마크를 목표로 하고 5년 후의 일이었다. 태극마크를 단 유남규는 파키스탄에서 열린 아시아탁구 선수권대회에 출전했지만 북한 선수에게 패하며 충격을 받아 슬럼프에 빠졌다고 한다.

 

탁구붐을 일으킨 유남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유남규는 8강에서 중국의 장자량과 맞붙게 되는데 이 선수는 당시 세계챔피언이었고 유남규는 세계 50위에 랭크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기는 서로 두 세트씩 가져가며 2-2였고 마지막 세트에서 유남규는 10-18로 뒤지고 있었다. 유남규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이때부터 집중력을 발휘하며 경기를 듀스로 끌고 갔고 결국 22-20으로 역전승을 거두게 된다.

유남규는 여세를 몰아 4강과 준결승을 통과했고 결승에서 중국의 후이준 마저 3-0으로 꺾으며 금메달을 차지하며 대회 MVP를 수상하게 된다. 이 대회 이후 전국은 탁구붐이 일었고 학생들은 축구나 야구를 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탁구장으로 몰려들었고 직장인들도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 탁구를 즐기는 문화가 생겨났다.

그리고 유남규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기는데 1988년 서울 올림픽에 탁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이다. 대표팀은 대회를 앞두고 600일간 합숙을 하며 훈련을 하게 된다. 오전 6시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고된 훈련을 하며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탁구에만 매달리는 강행군이었다. 너무 힘들어 울기도 했지만 과정에 모자람이 없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악착같이 버텨냈다.

이런 정규 훈련뿐 아니라 혼자 5시 20분에 일어나 혼자 뛰고 들어와 자는 척하다가 6시에 다시 훈련을 시작하기도 했으며 저녁에도 8시 30분에 훈련이 종료돼도 10시까지 운동을 이어갔다. 훈련강도를 높이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차고 훈련을 했고 이를 숨기려고 긴 운동복을 입기도 한다.

 

대망의 서울 올림픽

탁구가 처음으로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서울 올림픽에서 중국의 장자량과 스웨덴의 얀오베 발트너와 함께 유남규는 유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결승에서 붙은 상대는 대한민국의 김기택이었다. 유남규는 김기택에게 강했지만 그가 결승에 오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해 마땅한 전략을 준비해놓지 않았었다. 그래서 1세트를 먼저 내주게 되는데 이때부터 전략을 바꿔 빠르게 공격해나갔다. 한점 한점 따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고 세트스코어 3-1로 김기택을 꺾으며 올림픽 최초의 탁구 금메달리스트가 된다.

그러나 올림픽 이후 부상에 시달렸고 소속팀과의 갈등도 생기며 1년간 탁구채를 잡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그가 빠진 탁구계에서 치고 올라온 선수가 있었는데 이 선수가 바로 김택수였다. 김택수는 이후 복귀한 유남규와 단식에서는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복식에서는 환상적인 호흡을 선보이며 90년 월드컵과 92년 월드컵 복식에서 김택수와 함께 우승을 차지하며 월드컵 복식 2회 우승을 달성한다.

언론에서는 유남규와 김택수를 라이벌로 불렀지만 막상 둘은 서로 라이벌이 아닌 형, 동생 사이로 가깝게 지냈고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국가대표팀 감독이나, 실업팀 감독을 거치며 대한탁구협회 이사를 맡는 등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라이벌이 아닌 탁구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동반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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